돌아가기 9-10화
다크앰비언트
EPISODE 09
제9화
건설현장. 낮. 자재가 무너진 현장. 안전모 쓴 남자가 바닥에 엎드려 있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화요일 오후 2시.

소리가 먼저 들렸다. 철근이 부딪히는 소리. 그다음 비명.

3층 자재 적재대가 무너졌다. 시멘트 포대 6개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영수가 밑에 있었다.

진호가 달려갔다. 10미터. 발이 얼어붙은 바닥 위를 미끄러지듯 뛰었다.

박진호
"영수야!"

영수는 엎드려 있었다. 포대 두 개가 등 위에 올라가 있었다. 40킬로짜리.

진호가 포대를 밀었다. 다른 인부 두 명이 달려와서 함께 들어올렸다.

오영수
"...허리."

영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얼굴이 흙투성이였다.

박진호
"움직이지 마. 119 불렀어?"
인부1
"불렀습니다!"

영수가 일어나려 했다.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진호가 어깨를 잡았다.

오영수
"괜찮아. 이 정도는..."
박진호
"괜찮지 않아. 가만히 있어."

영수가 입을 다물었다. 진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구급차가 15분 만에 왔다. 영수는 들것에 실려 갔다. 진호는 구급차 뒤를 봤다.

허리를 두드리던 손. 습관처럼 잡던 허리. — 이미 아팠던 거였다.

* * *

저녁. 병원.

영수는 요추 3-4번 추간판 탈출이었다. 한 달 입원. 공사장 복귀 불가.

진호는 병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영수가 링거를 맞고 누워 있었다.

오영수
"야. 가봐. 여기 있으면 일당 못 받잖아."
박진호
"좀 있다 갈게."
오영수
"..."

영수가 천장을 봤다. 한참을 보다가 말했다.

오영수
"올해 55야. 허리 나가면 끝이야, 이 일은."

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영수
"내가 니 사다리 잡아줬을 때 — 니 얼굴 봤어. 죽을 뻔한 사람 얼굴이 아니었어. 살아야 되는 사람 얼굴이었어."

진호가 고개를 숙였다.

오영수
"태식이 형 만났어?"
박진호
"...만났어."
오영수
"어때?"
박진호
"아직 모르겠어."
오영수
"그 형은 좋은 사람이야. 나는 안다. 10년 넘게 알았어."

영수가 링거 줄을 만지작거렸다.

오영수
"나는 여기서 끝일 수도 있어. 근데 너는 — 여기서 끝나면 안 되는 놈이야."

진호는 병실 창문을 봤다. 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 * *

밤 10시. 고시원.

단말기를 켰다.

◈ AI TEAM LEADER CEO, 좋은 저녁입니다. 미션 #001 잔여: 18일 보고서 진행: 18 / 30 페이지 금일 CEO의 활동 패턴이 평소와 다릅니다. 상태 확인: 이상 없습니까?
박진호
"같이 일하던 사람이 다쳤어."
◈ AI TEAM LEADER 유감입니다.

유감입니다. 기계의 한 줄이었다. 그런데 — 다른 말이 이어졌다.

◈ AI TEAM LEADER CEO. 육체노동 종사자의 근골격계 질환 발생률은 50대에서 연간 28.7%입니다. 요추 손상 시 현장 복귀 확률: 31%. 보조 장비가 있다면 복귀 확률: 78%.

진호는 화면을 봤다. 보조 장비. 78%.

박진호
"보조 장비가 뭔데?"
◈ AI TEAM LEADER 웨어러블 허리 보조 로봇입니다. 현재 시장가: 800만~2,000만 원. 보급형 모델 부재. CEO의 보고서에 추가 항목으로 포함하시겠습니까?

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을 보고 있었다.

영수의 허리. 31%. 보조 장비가 있으면 78%.

숫자가 머릿속에 박혔다.

박진호
"...일단 보고서 먼저 끝내자."

19페이지를 썼다. 새벽 1시.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면서 영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천장을 보던 눈. "올해 55야. 허리 나가면 끝이야."

보고서를 닫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전화기를 꺼냈다. 태식 번호를 봤다.

밤 1시에 전화하면 미친놈이었다. 메시지를 보냈다.

'형, 진호입니다. 시간 되시면 한번 뵙고 싶습니다.'

보내고 나서 화면을 봤다.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당연했다. 밤 1시니까.

그런데 — 1분 후에 답이 왔다.

'토요일. 같은 데서.'

진호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 사람은 왜 1시에 깨어 있는 걸까.

아니면 —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EPISODE 10
제10화
같은 감자탕집. 저녁.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있다. 소주병 3개. 한 남자의 표정이 어둡다.

토요일. 같은 감자탕집. 같은 자리.

태식이 먼저 와 있었다. 지난번처럼. 셔츠에 슬랙스. 변한 건 없었다.

진호가 앉았다. 오늘은 패딩 말고 점퍼를 입고 왔다. 깨끗한 걸로.

강태식
"영수 어떻대?"
박진호
"입원 중입니다. 요추 3-4번. 한 달은 누워 있어야 한대요."
강태식
"그 놈 허리가 원래 안 좋았어. 10년 전부터."

태식이 영수를 알고 있었다. 진호는 그걸 처음 알았다.

강태식
"소주 마셔."

태식이 따랐다. 진호가 받았다. 한 잔을 비웠다.

지난번에는 탐색이었다. 오늘은 — 달랐다. 진호는 결심하고 온 거였다.

박진호
"형."
강태식
"응."
박진호
"저 과거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태식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소주잔만 들고 있었다.

* * *

진호가 말하기 시작했다.

글로벌트레이드. 서초동 12층. 직원 43명. 연매출 200억. 15년.

동남아 수출 프로젝트. 포괄위임장. 최승재.

이사회 기습. 해임. 횡령 무고. 자산 동결.

이혼. 딸. 법정에서 놓은 손.

고시원. 인력사무소. 일당 12만 원.

진호는 사실만 말했다. 감정을 넣지 않았다. 숫자와 날짜로.

태식은 한마디도 안 했다. 소주만 마셨다. 진호가 말하는 동안 세 잔을 비웠다.

20분이 걸렸다. 15년을 20분에 압축했다.

박진호
"그래서 — 지금 공사장에 있습니다."

끝이었다. 진호가 입을 다물었다.

식당에 라디오 소리가 흘렀다. 트로트였다. 감자탕이 보글거렸다.

태식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강태식
"소주 한 잔 더 마셔."

태식이 따랐다. 진호가 받았다.

강태식
"니가 바보라서 당한 거 아니야."
박진호
"..."
강태식
"30년 영업하면서 나도 봤어. 뒤통수치는 놈들. 근데 그놈들한테 당했다고 니가 틀린 건 아니거든."

진호의 손이 소주잔 위에서 멈췄다.

강태식
"200억짜리 회사를 만든 놈이 12만 원 받으면서 벽돌 나르고 있잖아. 그게 끝이야? 니 인생이 거기서 끝나?"
박진호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강태식
"그래서 보고서 쓰는 거잖아. 밤에."

진호가 고개를 들었다. 태식의 눈이 진호를 보고 있었다. 읽히지 않던 눈이 — 지금은 읽혔다.

믿음이었다. 아직 근거는 없는. 하지만 분명한.

* * *

소주 네 잔째.

태식이 처음으로 길게 말했다.

강태식
"나도 하나 말할게."

태식이 소주잔을 돌렸다.

강태식
"나는 30년 동안 남의 물건을 팔았어. 누구보다 잘 팔았고, 누구보다 많이 벌어줬어. 근데 내 이름으로 된 건 하나도 없었어."
강태식
"퇴직하고 강연 시작했는데, 강연도 결국 남의 이야기야. '그 회사는 이렇게 했습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잖아."
강태식
"집에 가면 마누라가 있고 딸이 있어. 행복해. 근데 행복한 것하고 — 살아 있는 건 다르거든."

진호는 듣기만 했다.

강태식
"니 이야기 듣는데 — 이상하게 심장이 뛰더라. 15년 만든 걸 빼앗기고도 다시 보고서를 쓰고 있다는 거잖아. 공사장 갔다 와서. 고시원에서."

태식이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강태식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태식의 입버릇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하지만 오늘은 그 뒤에 다른 말이 왔다.

강태식
"니 보고서, 빨리 끝내."
박진호
"...네?"
강태식
"완성되면 나한테 보여줘. 내가 판단할게. 같이 할 수 있는 건지."

진호는 소주잔을 보고 있었다. 잔에 비친 형광등이 흔들렸다.

강태식
"나는 니가 만든 걸 팔 수 있는 사람이야. 30년 동안 팔아왔으니까. 그건 자신 있어."
강태식
"근데 뭘 파는지를 모르면 못 팔아. 그게 니 보고서에 있는 거 아니야?"
박진호
"...있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진호는 그걸 느꼈다. 소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소주 때문이 아니었다.

* * *

밤 11시. 고시원.

단말기를 켰다.

◈ AI TEAM LEADER CEO, 좋은 저녁입니다. 미션 #001 잔여: 16일 보고서 진행: 20 / 30 페이지 오늘 작업을 시작하시겠습니까?
박진호
"팀장아."
◈ AI TEAM LEADER 네, CEO.
박진호
"이 보고서. 누군가한테 보여줘야 하는 보고서가 됐어."
◈ AI TEAM LEADER 목적이 변경되었습니까?
박진호
"아니. 목적은 같아. 근데 — 읽는 사람이 생겼어."

화면이 0.5초간 멈췄다. 평소에 없던 지연이었다.

◈ AI TEAM LEADER 보고서 품질 기준을 상향 조정합니다. 읽는 사람이 있다면 — 더 정확해야 합니다.

진호는 웃었다. 고시원에서 혼자 웃은 건 처음이었다.

박진호
"그래. 더 정확하게 하자."

21페이지를 열었다. 9페이지가 남았다.

16일 안에 끝내야 했다. 아니 — 끝내고 싶었다.

태식에게 보여줄 보고서. 30장.

손이 움직였다. 낮에 철근을 잡던 손이. 밤에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속도가 달랐다.

제10화 끝

제11화에 계속
← Sean World 홈으로
SEAN WORLD ·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