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26페이지.
3주가 지났다. 낮에 공사장, 밤에 보고서. 영수가 없는 공사장은 더 조용했다. 아무도 김밥을 나눠주지 않았다.
매일 밤 4페이지씩. 진호가 쓰고 팀장이 데이터를 붙였다. 진호가 다시 읽고, 문장을 다듬었다.
AI가 뽑은 데이터는 정확했다. 하지만 보고서는 데이터가 아니었다. 스토리였다.
개선된 게 아니었다. 진호가 15년 동안 써먹던 영업 구조였다. 돈을 쓰게 만드는 보고서의 뼈대.
AI는 숫자를 알았다. 진호는 사람을 알았다.
27페이지를 쓰다가 손이 멈췄다.
보고서 3번 항목 — '사업 실패 사례 분석.' 실패한 중소기업 12곳의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수출입 업종이었다.
글로벌트레이드는 넣지 않았다. 자기 회사니까. 하지만 데이터를 읽으면서 — 기억이 올라왔다.
최승재.
처음 만난 건 2010년이었다. 무역 박람회. 진호가 단독 부스를 운영하고 있었고, 승재가 명함을 들고 왔다.
능글맞은 웃음. 하지만 일은 잘했다. 인도네시아 바이어 3곳을 연결해줬고, 그 중 하나가 연매출 30억짜리 거래처가 됐다.
5년 동안 함께 했다. 승재가 동남아 전체를 맡았다. 진호가 국내와 일본을 봤다. 분업이 완벽했다.
그런 줄 알았다.
포괄위임장. 진호가 출장 중에 서명한 서류. 승재가 준비한 서류.
동남아 법인의 지분을 승재 명의로 이전하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진호는 읽지 않았다. 5년을 함께한 사람의 서류를 — 읽지 않았다.
이사회. 지분 58%. 승재가 대표 자리에 앉았다. 진호는 박스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날을 떠올리면 — 분노가 아니라 자기 혐오가 올라왔다. 왜 안 읽었을까. 왜 믿었을까.
진호는 단말기를 봤다.
신용등급 B-. 하락 추세.
진호가 떠난 후 3개월. 이미 기울고 있었다.
만족감은 없었다. 43명이 거기 있었다. 진호가 뽑은 사람들.
과거를 닫았다. 보고서로 돌아왔다.
27페이지. 3장 남았다.
미션 잔여 9일.
보고서 28페이지. 29페이지. 30페이지.
마지막 페이지는 '실행 로드맵'이었다. 3개월, 6개월, 12개월 단위 계획.
진호가 직접 그렸다. AI가 데이터를 넣었다. 진호가 순서를 바꿨다. AI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30페이지.
새벽 3시. 21일 걸렸다. 매일 밤 4시간씩. 낮에 벽돌을 나르고 밤에 보고서를 쓴 21일.
진호는 화면을 봤다. 스크롤을 위로 올렸다. 1페이지부터 다시 읽었다.
괜찮았다. 아니 —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진호가 15년간 만든 제안서 중에서도 상위 5개에 들었다.
차이가 있다면 — 이건 남의 회사 것이 아니었다. 자기 것이었다.
태식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전화기를 꺼냈다. 메시지를 썼다.
'형, 보고서 끝났습니다.'
새벽 3시. 이번에는 답이 바로 오지 않을 거였다.
왔다.
'내일 낮에 보자. 점심 내가 산다.'
또 깨어 있었다. 이 사람은 대체 밤에 뭘 하는 걸까.
진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단말기를 봤다. 파란 빛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30장. 내일 태식이 읽는다.
이 30장이 —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낮 12시. 홍대 근처 카페.
태식이 고른 장소였다. 감자탕집이 아니라 카페. 의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 진호는 서류를 가져왔다.
A4 30장. 투명 파일에 넣었다. 고시원 근처 편의점에서 출력했다. 장당 100원. 3,000원.
태식에게 건넸다. 태식이 받았다.
태식이 첫 페이지를 넘겼다.
진호는 커피를 마셨다. 아메리카노. 4,500원. 비쌌다. 하지만 오늘은 — 써야 하는 돈이었다.
태식이 읽었다. 느렸다.
진호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게 익숙했다. 15년 동안 제안서를 내고 기다렸다. 결과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된다. 안 된다.
5페이지. 태식의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10페이지. 태식이 뒤로 넘겼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7페이지를 다시 읽었다.
15페이지. 태식이 커피를 마셨다. 눈은 종이에서 떠나지 않았다.
20페이지. 태식의 손가락이 표 위에서 멈췄다. ROI 시뮬레이션 — 진호가 직접 구조를 짠 부분이었다.
25페이지. 태식이 한 번 고개를 들었다. 진호를 봤다. 아무 말 없이 다시 내려다봤다.
30페이지.
태식이 서류를 덮었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커피잔 옆에.
40분이 걸렸다. 30장을 40분에 읽었다. 느린 편이었다. 한 줄도 건너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진호는 기다렸다.
태식이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아메리카노 두 잔.
진호는 가슴이 뛰었다. 표정에 내지 않았다.
태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진호의 손이 무릎 위에서 움켜쥐어졌다.
진호가 숨을 내쉬었다. 자기도 모르게.
진호는 잠깐 멈췄다. 영수. 허리. 31%.
태식이 서류를 다시 펼쳤다. 20페이지. 한 번 더 읽었다.
진호는 아무 말도 안 했다. 태식이 다시 서류를 덮었다.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식이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태식이 일어났다. 커피값을 계산했다. 두 잔 다.
진호는 카페에 혼자 남았다. 빈 투명 파일만 테이블 위에 있었다.
이틀이 지났다. 연락이 없었다.
사흘. 없었다.
나흘.
진호는 공사장에 갔다. 벽돌을 날랐다. 밤에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단말기를 켰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재촉하면 안 됐다. 15년 동안 배운 거였다. 제안서를 낸 후에 먼저 전화하면 — 약해 보인다.
하지만 밤에 천장을 보면서 생각했다.
망한 사람의 헛소리로 본 건 아닐까. 100억짜리 사업을 말아먹은 놈이 고시원에서 쓴 보고서.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뒤집어 누웠다. 고시원 벽이 코앞이었다.
닷새째. 전화기를 봤다. 알림이 없었다.
진호는 전화기를 뒤집어 놓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