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13-14화
피아노 발라드
EPISODE 13
제13화

엿새째.

공사장. 저녁. 노을. 남자가 안전모를 벗고 벤치에 앉아 있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보고 있다.

공사장이 끝나고 현장 밖 벤치에 앉았다. 몸에서 시멘트 냄새가 났다.

전화기를 봤다. 습관이었다. 알림은 없었다.

넣으려는데 — 울렸다.

강태식.

진호의 손이 멈췄다. 1초. 2초. 3초째에 받았다.

박진호
"네, 형님."

잠깐 침묵이 흘렀다.

강태식
"보고서 말이야."

진호가 벤치를 잡았다.

강태식
"읽고 나서 며칠 동안 계속 생각했어."
박진호
"..."
강태식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고. 네 보고서를 읽고 나니까."

진호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강태식
"내가 30년 동안 영업하면서 본 세상이랑, 니가 그 보고서에 그린 세상이 완전히 다르거든. 근데 이상하게 — 니 쪽이 맞는 것 같아."
박진호
"형님, 그건..."
강태식
"내가 원하는 세상을 니가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나는 — 니가 그걸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어."

진호는 숨을 멈추고 있었다.

강태식
"사람이야. 내가 가진 건 사람밖에 없거든."

노을이 공사장 위로 번지고 있었다. 크레인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강태식
"내가 너를 도와줄게. 같이 하자."

같이 하자.

4글자.

진호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AI 팀장 이후 처음으로 — 인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박진호
"...감사합니다, 형."
강태식
"고마우면 소주 사. 토요일에."

전화가 끊겼다. 진호는 전화기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공사장 먼지가 바람에 날렸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진호는 벤치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 * *

밤. 고시원.

단말기를 켰다.

박진호
"팀장아."
◈ AI TEAM LEADER 네, CEO.
박진호
"사람이 생겼어."
◈ AI TEAM LEADER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박진호
"같이 사업할 사람. 강태식. 55세. 영업 경력 30년. 유통 인맥."
◈ AI TEAM LEADER 파트너 등록: 강태식 역할 분석 중... ▶ CEO 역량: 기술 + 전략 + AI ▶ 파트너 역량(추정): 영업 + 인맥 + 현장 경험 상호 보완도: 높음 CEO, 한 가지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박진호
"뭔데?"
◈ AI TEAM LEADER CEO의 과거 파트너십 이력에서 신뢰 리스크가 검출됩니다. 검증 절차를 권고합니다.

진호는 화면을 봤다. 신뢰 리스크. 최승재를 말하는 거였다.

박진호
"알아. 근데 이번엔 다르다."
◈ AI TEAM LEADER 근거를 입력해주십시오.

진호는 잠깐 생각했다.

박진호
"영수가 보증했어. 그리고 — 6일 동안 30장을 읽고 전화해온 사람이야. 가볍게 같이 하자는 거 아니야."
◈ AI TEAM LEADER 이해했습니다. 파트너 강태식을 등록합니다. CEO의 판단을 신뢰합니다.

'신뢰합니다.' 기계가 신뢰한다고 했다. 이상한 말이었다.

진호는 단말기를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같은 천장. 같은 고시원. 하지만 오늘은 — 혼자가 아니었다.

팀장이 있었다. 태식이 생겼다. 영수가 병원에 있었다.

네 명.

이 정도면 시작할 수 있었다.

EPISODE 14
제14화
토요일 낮. 감자탕집이 아닌 카페. 두 남자가 노트북을 사이에 놓고 진지하게 대화 중.

토요일. 태식과 세 번째 만남.

이번에는 감자탕집이 아니었다. 태식이 노트북을 들고 왔다. 진호도 단말기를 가져왔다. — 가방 안에 넣어서. 꺼내지는 않았다.

강태식
"사업 방향을 정리하자. 내가 보고서 읽으면서 체크한 게 있어."

태식이 보고서를 펼쳤다. 포스트잇이 7장 붙어 있었다. 6일 동안 읽은 흔적이었다.

강태식
"니 보고서에 사업 모델이 세 개야. 컨설팅, 웨어러블, 스마트팜. 셋 다 하면 죽어. 하나만 먼저."
박진호
"컨설팅이 제일 빠릅니다. 자본이 필요 없으니까."
강태식
"그 AI 도구 — 대체 뭔데?"
박진호
"나중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도구라고만."
강태식
"그래. 니 도구니까."

태식이 더 묻지 않았다. 선을 아는 사람이었다.

* * *

태식이 노트북을 열었다. 엑셀. 30년 인맥 중 AI 도입이 필요한 중소기업. 87개.

강태식
"이 중에서 당장 만날 수 있는 데가 12곳이야. 내가 전화하면 미팅은 잡혀. 근데 먼저 해야 할 게 있어."
박진호
"뭡니까?"
강태식
"사업자등록."
* * *

다음 주 월요일.

세무서 내부. 번호표를 든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다.

세무서. 상호명을 정해야 했다. 단말기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이건 자기가 정해야 했다.

박진호
"SEAN."
강태식
"션?"
박진호
"S-E-A-N. 영문입니다."
강태식
"무슨 뜻이야?"
박진호
"Smart Enterprise AI Network. 그리고 — 제 영어 이름입니다."

태식이 한 번 웃었다. 살짝.

강태식
"니 이름을 건다는 거네."
박진호
"이번엔 — 제 이름으로 합니다."

서류를 작성했다. 대표자: 박진호. 상호: SEAN AI 연구소. 업태: 정보기술업. 종목: AI 컨설팅.

번호가 불렸다. 접수했다. 5분 걸렸다.

끝이었다. 종이 한 장. 사업자등록증.

진호는 세무서 밖에서 그 종이를 봤다. 햇빛 아래서.

글로벌트레이드를 차렸을 때는 법무법인이 다 해줬다. 변호사, 세무사, 5명이 붙었다.

이번에는 세무서에 직접 갔다. 종이 한 장. 수수료 0원.

규모가 달랐다. 하지만 — 무게는 같았다.

* * *

밤. 고시원.

단말기를 켰다. 사업자등록증을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줬다.

◈ FACTORY SYSTEM — UPDATE 신규 법인 감지: SEAN AI 연구소 대표: 박진호 등록일: 2025년 2월 CEO 레벨: Lv.0 → Lv.1 칭호: [시작한 자] ┌─────────────────────────────┐ │ SEAN AI Lab — INITIALIZED │ └─────────────────────────────┘

Lv.1. 시작한 자.

화면이 바뀌면서 새로운 모듈이 떴다.

◈ MODULE UNLOCK [사업 기초] 모듈 해금 ▶ 재무 관리 ▶ 거래처 관리 ▶ 일정 관리 미션 #001 달성 조건 갱신: ▶ 보고서 완성 ✅ ▶ 사업자 등록 ✅ ▶ 첫 수익 달성 — 미완료 잔여: 2일

2일. 미션 기한이 이틀 남았다. 보고서는 끝냈고, 사업자는 냈다. 하지만 — 첫 수익이 없었다.

박진호
"팀장아. 이틀 안에 수익을 만들 수 있어?"
◈ AI TEAM LEADER CEO,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보고서 30장 중 7페이지 — 중소기업 물류비 절감 시뮬레이션을 샘플 리포트로 분리하여 유료 배포하는 방법입니다. 가격: 50,000원 대상: 강태식 파트너의 87개 거래처 중 물류비 비중 상위 10곳
박진호
"50,000원짜리 리포트를 누가 사?"
◈ AI TEAM LEADER 각 기업에 맞춤 데이터를 삽입하면 컨설팅 보고서가 됩니다. 무료 샘플 1장 + 유료 전체본 5만 원. CEO, 이것은 보고서를 파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파는 것입니다.

진호는 잠깐 웃었다. 미래를 파는 것. AI치고 거창했다.

하지만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박진호
"태식 형한테 연락할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내일 만날 수 있습니까? 첫 영업입니다.'

30초 만에 답이 왔다.

'어디?'

진호는 주소를 보냈다. 태식의 87개 리스트 중 첫 번째 — 인천의 중소 물류 업체.

내일. 첫 영업.

진호는 단말기를 보고, 사업자등록증을 보고, 다시 단말기를 봤다.

그때 화면이 한 번 깜빡였다. 0.3초. 시스템 창이 아닌 — 다른 무언가가 스쳤다.

숫자 같았다. 좌표 같기도 했다. 영어였다.

진호가 눈을 비볐다. 다시 봤다. 화면은 정상이었다.

박진호
"...뭐였지."

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서 그런 거였다. 3시간 수면이 한 달째였다.

내일을 위해 자야 했다. 단말기를 닫았다.

파란 빛이 꺼졌다. 그런데 — 0.5초 후에 다시 켜졌다가, 꺼졌다.

진호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보지 못했다.

제14화 끝

제15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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