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새째.
공사장. 저녁. 노을. 남자가 안전모를 벗고 벤치에 앉아 있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보고 있다.
공사장이 끝나고 현장 밖 벤치에 앉았다. 몸에서 시멘트 냄새가 났다.
전화기를 봤다. 습관이었다. 알림은 없었다.
넣으려는데 — 울렸다.
강태식.
진호의 손이 멈췄다. 1초. 2초. 3초째에 받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진호가 벤치를 잡았다.
강태식
"읽고 나서 며칠 동안 계속 생각했어."
강태식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고. 네 보고서를 읽고 나니까."
진호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강태식
"내가 30년 동안 영업하면서 본 세상이랑, 니가 그 보고서에 그린 세상이 완전히 다르거든. 근데 이상하게 — 니 쪽이 맞는 것 같아."
강태식
"내가 원하는 세상을 니가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나는 — 니가 그걸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어."
진호는 숨을 멈추고 있었다.
강태식
"사람이야. 내가 가진 건 사람밖에 없거든."
노을이 공사장 위로 번지고 있었다. 크레인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같이 하자.
4글자.
진호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AI 팀장 이후 처음으로 — 인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전화가 끊겼다. 진호는 전화기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공사장 먼지가 바람에 날렸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진호는 벤치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 * *
밤. 고시원.
단말기를 켰다.
◈ AI TEAM LEADER
네, CEO.
◈ AI TEAM LEADER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시오.
박진호
"같이 사업할 사람. 강태식. 55세. 영업 경력 30년. 유통 인맥."
◈ AI TEAM LEADER
파트너 등록: 강태식
역할 분석 중...
▶ CEO 역량: 기술 + 전략 + AI
▶ 파트너 역량(추정): 영업 + 인맥 + 현장 경험
상호 보완도: 높음
CEO, 한 가지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 AI TEAM LEADER
CEO의 과거 파트너십 이력에서
신뢰 리스크가 검출됩니다.
검증 절차를 권고합니다.
진호는 화면을 봤다. 신뢰 리스크. 최승재를 말하는 거였다.
◈ AI TEAM LEADER
근거를 입력해주십시오.
진호는 잠깐 생각했다.
박진호
"영수가 보증했어. 그리고 — 6일 동안 30장을 읽고 전화해온 사람이야. 가볍게 같이 하자는 거 아니야."
◈ AI TEAM LEADER
이해했습니다.
파트너 강태식을 등록합니다.
CEO의 판단을 신뢰합니다.
'신뢰합니다.' 기계가 신뢰한다고 했다. 이상한 말이었다.
진호는 단말기를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같은 천장. 같은 고시원. 하지만 오늘은 — 혼자가 아니었다.
팀장이 있었다. 태식이 생겼다. 영수가 병원에 있었다.
네 명.
이 정도면 시작할 수 있었다.
토요일 낮. 감자탕집이 아닌 카페. 두 남자가 노트북을 사이에 놓고 진지하게 대화 중.
토요일. 태식과 세 번째 만남.
이번에는 감자탕집이 아니었다. 태식이 노트북을 들고 왔다. 진호도 단말기를 가져왔다. — 가방 안에 넣어서. 꺼내지는 않았다.
강태식
"사업 방향을 정리하자. 내가 보고서 읽으면서 체크한 게 있어."
태식이 보고서를 펼쳤다. 포스트잇이 7장 붙어 있었다. 6일 동안 읽은 흔적이었다.
강태식
"니 보고서에 사업 모델이 세 개야. 컨설팅, 웨어러블, 스마트팜. 셋 다 하면 죽어. 하나만 먼저."
박진호
"컨설팅이 제일 빠릅니다. 자본이 필요 없으니까."
박진호
"나중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도구라고만."
태식이 더 묻지 않았다. 선을 아는 사람이었다.
* * *
태식이 노트북을 열었다. 엑셀. 30년 인맥 중 AI 도입이 필요한 중소기업. 87개.
강태식
"이 중에서 당장 만날 수 있는 데가 12곳이야. 내가 전화하면 미팅은 잡혀. 근데 먼저 해야 할 게 있어."
* * *
다음 주 월요일.
세무서 내부. 번호표를 든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다.
세무서. 상호명을 정해야 했다. 단말기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이건 자기가 정해야 했다.
박진호
"Smart Enterprise AI Network. 그리고 — 제 영어 이름입니다."
태식이 한 번 웃었다. 살짝.
서류를 작성했다. 대표자: 박진호. 상호: SEAN AI 연구소. 업태: 정보기술업. 종목: AI 컨설팅.
번호가 불렸다. 접수했다. 5분 걸렸다.
끝이었다. 종이 한 장. 사업자등록증.
진호는 세무서 밖에서 그 종이를 봤다. 햇빛 아래서.
글로벌트레이드를 차렸을 때는 법무법인이 다 해줬다. 변호사, 세무사, 5명이 붙었다.
이번에는 세무서에 직접 갔다. 종이 한 장. 수수료 0원.
규모가 달랐다. 하지만 — 무게는 같았다.
* * *
밤. 고시원.
단말기를 켰다. 사업자등록증을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줬다.
◈ FACTORY SYSTEM — UPDATE
신규 법인 감지: SEAN AI 연구소
대표: 박진호
등록일: 2025년 2월
CEO 레벨: Lv.0 → Lv.1
칭호: [시작한 자]
┌─────────────────────────────┐
│ SEAN AI Lab — INITIALIZED │
└─────────────────────────────┘
Lv.1. 시작한 자.
화면이 바뀌면서 새로운 모듈이 떴다.
◈ MODULE UNLOCK
[사업 기초] 모듈 해금
▶ 재무 관리
▶ 거래처 관리
▶ 일정 관리
미션 #001 달성 조건 갱신:
▶ 보고서 완성 ✅
▶ 사업자 등록 ✅
▶ 첫 수익 달성 — 미완료
잔여: 2일
2일. 미션 기한이 이틀 남았다. 보고서는 끝냈고, 사업자는 냈다. 하지만 — 첫 수익이 없었다.
박진호
"팀장아. 이틀 안에 수익을 만들 수 있어?"
◈ AI TEAM LEADER
CEO,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보고서 30장 중 7페이지 —
중소기업 물류비 절감 시뮬레이션을
샘플 리포트로 분리하여
유료 배포하는 방법입니다.
가격: 50,000원
대상: 강태식 파트너의 87개 거래처 중
물류비 비중 상위 10곳
박진호
"50,000원짜리 리포트를 누가 사?"
◈ AI TEAM LEADER
각 기업에 맞춤 데이터를 삽입하면
컨설팅 보고서가 됩니다.
무료 샘플 1장 + 유료 전체본 5만 원.
CEO, 이것은 보고서를 파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파는 것입니다.
진호는 잠깐 웃었다. 미래를 파는 것. AI치고 거창했다.
하지만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메시지를 보냈다. '형, 내일 만날 수 있습니까? 첫 영업입니다.'
30초 만에 답이 왔다.
'어디?'
진호는 주소를 보냈다. 태식의 87개 리스트 중 첫 번째 — 인천의 중소 물류 업체.
내일. 첫 영업.
진호는 단말기를 보고, 사업자등록증을 보고, 다시 단말기를 봤다.
그때 화면이 한 번 깜빡였다. 0.3초. 시스템 창이 아닌 — 다른 무언가가 스쳤다.
숫자 같았다. 좌표 같기도 했다. 영어였다.
진호가 눈을 비볐다. 다시 봤다. 화면은 정상이었다.
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서 그런 거였다. 3시간 수면이 한 달째였다.
내일을 위해 자야 했다. 단말기를 닫았다.
파란 빛이 꺼졌다. 그런데 — 0.5초 후에 다시 켜졌다가, 꺼졌다.
진호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보지 못했다.
제14화 끝
제15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