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남동공단. 오전 10시.
진호는 코트를 빌려 입었다. 태식 것이었다. 사이즈가 좀 컸지만 — 공사장 패딩보다는 나았다.
진호가 손을 꺼냈다. 태식이 웃었다.
(주)한솔로지스. 직원 45명. 연매출 120억. 수도권 물류 배송 업체.
태식이 문을 열었다. 사장실로 안내받았다.
박정환 사장. 50대 초반. 태식의 영업이사 시절 거래처 사장이었다.
악수. 진호의 손에 거푸집 상처가 있었다. 정환은 눈치채지 못했다.
30분. 진호가 리포트를 설명했다. 한솔로지스의 공개 데이터를 기반으로 AI가 분석한 물류비 절감 시뮬레이션.
정환이 리포트를 다시 봤다.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50만 원. 어젯밤에 태식과 상의해서 올린 가격이었다. 5만 원이 아니라 50만 원. 태식이 말했다. "너무 싸면 안 사. 싼 건 안 믿거든."
첫 계약. 50만 원.
사장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태식이 진호 어깨를 쳤다.
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웃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밤. 고시원.
한솔로지스 전체 분석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다. 3일 안에.
단말기를 켰다.
진호의 손이 멈췄다.
영수. 요추 3-4번.
잠깐. 진호는 팀장에게 영수의 진단명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병원에서 들었다. '요추 3-4번 추간판 탈출.' 그 말을 한 건 의사였다. 진호는 기억했다. 그리고 — 단말기에는 말하지 않았다.
0.8초의 지연. 평소에 없던 시간이었다.
진호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추론. 대화 패턴.
거짓말이었다. 진호는 "같이 일하던 사람이 다쳤어"라고만 말했다. 허리라고도, 요추라고도, 3-4번이라고도 말한 적이 없었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보고서를 이어 썼다. 하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기계는 어떻게 아는 걸까. 진호가 말하지 않은 것을.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보고서가 우선이었다. 50만 원. 첫 수익. 미션 기한이 내일까지였다.
하지만 등줄기의 서늘함은 — 새벽까지 가시지 않았다.
3일 후. 한솔로지스 전체 보고서를 보냈다. 이메일.
저녁에 정환 사장한테 전화가 왔다.
도입 논의. 50만 원짜리 보고서가 — 그다음 단계로 간다는 뜻이었다.
전화를 끊고 통장을 확인했다. 입금: 500,000원. 한솔로지스.
50만 원.
진호는 고시원 침대에 앉아 통장 화면을 봤다. 3개월 전, 잔고가 12,000원이었다. 지금은 — 50만 원이 찍혀 있었다.
눈이 뜨거워졌다. 참았다. 참을 수 없었다.
울었다. 소리 없이. 고시원 벽이 얇았으니까.
Lv.2. 첫 수익의 사나이.
웃겼다. 한때 연매출 200억을 찍던 남자의 칭호가 '첫 수익의 사나이'였다.
근데 — 200억보다 이 50만 원이 무거웠다. 200억은 43명이 함께 만든 거였다. 50만 원은 진호가, 팀장이, 태식이 — 셋이서 만든 거였다.
태식에게 전화했다.
잠깐 침묵.
진호가 웃었다.
처음이었다. 태식이 '진호야'라고 부른 건.
두 글자. 진호는 전화기를 귀에 대고 한참 있었다.
영수에게 병원에 갔다. 과일을 사 갔다. 사과 한 봉지. 3,000원.
영수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허리를 잡으며.
영수가 웃었다. 진호도 웃었다.
진호는 사과를 깎았다. 영수가 받아 먹었다. 병실 창밖으로 겨울 해가 지고 있었다.
밤. 고시원.
단말기를 켰다.
진호는 웃었다. 기계가 휴식이 성과라고 했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같은 천장. 같은 고시원.
하지만 3개월 전과 달랐다. 그때는 천장만 보였다. 지금은 — 천장 너머가 보였다.
내일은 수원. 두 번째 거래처. 태식이 문을 열고, 진호가 설명한다.
50만 원. 시작이었다.
아직 바닥이었다. 하지만 — 바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