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7-8화
다크앰비언트
EPISODE 07
제7화
새벽 건설현장. 영하의 안개 속 철근 더미. 안전모 쓴 남자들의 실루엣. 숨에서 하얀 김.

이틀이었다.

단말기를 켜고, 미션을 수락하고, 이틀 동안 방에서 AI와 일했다. 사업 모델을 정리하고, 구조를 그리고, 보고서 첫 5페이지를 썼다.

그리고 통장을 봤다. 32,000원.

월세가 28만 원. 15일 남았다. 밥을 먹어야 했고, 교통비가 있어야 했다.

다시 인력사무소 줄에 섰다.

* * *
1월의 공사장. 콘크리트 위에 서리. 철근을 나르는 남자. 장갑 낀 손이 빨갛다.

영하 11도.

손이 안 움직였다. 장갑을 꼈는데도 손가락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진호는 철근을 들었다. 12킬로. 어제는 들 수 있었다. 오늘은 무거웠다.

1월의 서울. 공사장 바닥은 얼어 있었고, 콘크리트는 맨손에 달라붙었다.

낮에는 벽돌을 날랐다. 밤에는 보고서를 썼다.

새벽 2시까지 단말기 앞에 앉았다가, 5시에 일어나 공사장에 갔다. 3시간 수면. 사흘째.

오영수
"야. 쉬어. 얼굴이 파래."
박진호
"괜찮아."
오영수
"괜찮은 놈 얼굴이 아니야. 앉아."

진호는 앉지 않았다. 앉으면 다시 못 일어날 것 같았다.

점심. 컵라면. 영수가 자기 김밥 반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버렸다.

* * *

오후 3시. 4층 슬래브. 거푸집 해체.

사다리를 올라가는데 시야가 흔들렸다. 한 발을 헛디뎠다.

오영수
"잡아!"

영수의 손이 진호 팔을 잡았다. 진호의 등이 사다리에 부딪혔다.

2초. 떨어졌으면 4층이었다.

오영수
"미친놈아. 어제 밥 먹었어?"

먹었다.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

오영수
"오늘 일찍 들어가."
박진호
"일당 깎여."
오영수
"죽으면 일당이 무슨 소용이야."

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수가 맞았다.

허리를 숙여 안전모를 주웠다. 영수가 등을 돌리며 허리를 잡았다. 짧게. 습관처럼.

진호는 그걸 봤다. 아무 말도 안 했다.

* * *
밤. 고시원 방. 좁은 책상 위 단말기의 파란 빛. 이불을 어깨까지 덮은 남자.

밤 11시. 고시원.

이불을 어깨까지 덮었다. 난방은 자정에 꺼졌다. 그 전에 방이 따뜻해진 적은 없었다.

단말기를 켰다.

◈ AI TEAM LEADER CEO, 좋은 저녁입니다. 미션 #001 잔여: 25일 보고서 진행 현황: ▶ 완료: 8 / 30 페이지 ▶ 중소기업 데이터 수집: 127 / 300개사 오늘 작업을 시작하시겠습니까?

8페이지. 사흘 밤 동안 8페이지.

낮에 삽을 잡고, 밤에 보고서를 쓰는 생활이 닷새째였다. 몸은 부서지고 있었다. 하지만 보고서는 쌓이고 있었다.

박진호
"9페이지 시작하자."

팀장이 데이터를 뽑았다. 중소 제조업체 127곳의 인건비, 물류비, 재고 회전율. 진호가 읽었다. 모르는 항목은 물었다. 팀장이 설명했다. 진호가 다시 읽었다.

눈이 충혈됐다. 글자가 흐려졌다.

◈ AI TEAM LEADER CEO, 내일 기상 시간은 05:00입니다. 현재 수면 부족이 3일째입니다. 중단을 권고합니다.
박진호
"한 장만 더."

새벽 2시. 10페이지.

공사장에서 벽돌을 한 장씩 나르는 것과 같았다. 보고서도 한 장씩.

차이가 하나 있었다. 벽돌은 남의 건물을 올렸다. 보고서는 자기 건물을 올리고 있었다.

단말기를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난방은 이미 꺼져 있었다.

손이 시렸다. 낮에 철근을 잡던 손이었다.

* * *

다음 날. 공사장 끝나고 영수와 소주 한 잔.

포장마차. 두부김치에 소주. 영수가 쏜다고 했다.

오영수
"야, 너 요즘 왜 그래. 밤에 뭐 하냐."
박진호
"...공부."
오영수
"공부? 무슨?"

진호는 잠깐 망설였다. 말해야 할까. AI 단말기를 샀다고? 사업을 다시 한다고?

박진호
"그냥. 이것저것."
오영수
"이것저것 하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질 뻔한 거야?"

진호가 입을 다물었다. 영수가 소주를 따랐다.

오영수
"나도 여기 오래 있을 생각 없어. 허리가 내년까지 버틸지 모르겠다."

영수가 허리를 한 번 두드렸다. 또 그 동작이었다.

오영수
"근데 말이야. 나 아는 형이 하나 있거든."

진호가 고개를 들었다.

오영수
"강태식이라고. 옛날에 유통회사 영업이사 했던 사람인데, 요즘 강연 다니면서 사업할 사람 찾고 있어."
박진호
"...왜 나한테 말해?"
오영수
"너 사업했다며. 100억짜리."

진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술 먹다가 한 번 흘린 적이 있었다. 영수가 기억하고 있었다.

오영수
"한 번만 만나봐. 나쁜 사람 아니야."

진호는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사람을 믿으면 안 됐다. 마지막으로 믿은 사람이 회사를 가져갔다.

하지만 영수는 — 4층에서 떨어질 뻔한 진호를 잡아준 손이었다.

박진호
"...생각해볼게."
오영수
"생각하지 마. 만나기만 해. 생각은 만나고 나서 해."

영수가 두부김치를 집었다. 진호는 소주를 마셨다.

강태식.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고시원으로 돌아가면 단말기를 켜야 했다. 11페이지.

하지만 그보다 먼저 — 강태식이라는 세 글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EPISODE 08
제8화
허름한 식당 외관. 낡은 간판. 겨울 저녁. 안에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일주일을 끌었다.

영수가 세 번 물었다. "만나볼 거야, 안 만나볼 거야." 진호는 세 번 다 "생각 중이야"라고 했다.

네 번째에 영수가 말했다.

오영수
"내가 장소 잡았다. 토요일 저녁. 안 오면 나도 안 만나."

진호는 갔다.

* * *
식당 내부. 나무 테이블. 소주병 2개. 마주 앉은 두 남자. 한 명은 깔끔한 셔츠, 한 명은 작업복 위에 패딩.

을지로 골목 안쪽. 간판 글씨가 반쯤 벗겨진 식당. 감자탕집이었다.

태식은 먼저 와 있었다. 셔츠에 슬랙스. 178센티미터. 머리에 회색이 섞여 있었다. 55세라고 했다.

첫인상은 — 평범한 아저씨였다.

강태식
"박진호 씨? 영수한테 얘기 들었어."

목소리가 낮았다. 차분했다. 뉴스 앵커 같은 톤이 아니라, 그냥 — 오래 말을 아끼며 산 사람의 톤이었다.

박진호
"네. 앉아도 됩니까."
강태식
"앉아. 소주 마셔?"

진호는 앉았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태식이 소주를 따랐다.

진호는 상대를 봤다. 15년 동안 수백 번 했던 일. 사람을 읽는 것. 표정, 시선, 손의 위치.

태식은 — 읽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강태식
"영수가 그러더라. 사업 경험 있는 사람이 공사장에 있다고."
박진호
"...네."
강태식
"무슨 사업?"
박진호
"수출입."
강태식
"규모는?"
박진호
"연매출 200억. 직원 43명."

태식의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숫자에 놀라지 않는 사람. 숫자를 많이 본 사람이었다.

강태식
"그걸 왜 접었어?"

진호의 손이 소주잔 위에서 멈췄다.

접은 게 아니었다. 빼앗긴 거였다. 하지만 그 말은 — 나오지 않았다.

박진호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습니다."
강태식
"그래."

태식이 더 묻지 않았다. 진호는 그게 고마웠다.

감자탕이 나왔다. 태식이 먼저 먹었다. 진호도 먹었다.

뜨거웠다. 공사장 끝나고 먹는 국물은 늘 뜨거웠는데, 오늘은 유독 — 목까지 올라왔다.

* * *

소주 두 잔째.

태식이 자기 이야기를 했다. 물어보지 않았는데.

강태식
"나는 30년 동안 남의 회사에서 일했어. 유통. 영업이사까지 갔는데, 어느 날 보니까 — 내 이름으로 된 게 하나도 없더라고."

진호는 듣기만 했다.

강태식
"퇴직하고 강연 시작했어. 중소기업 영업 교육. 돈은 되는데, 매번 남의 회사 이야기만 해. 내 이야기는 없어."
박진호
"...강연이면 괜찮지 않습니까."
강태식
"괜찮지. 편하고. 근데 편한 게 문제야. 나 올해 55야. 편하게 죽을 수 있는 나이거든. 근데 — 그러고 싶지 않더라."

진호가 태식을 봤다. 55세. 편하게 죽을 수 있는 나이. 진호는 42세에 이미 죽을 뻔했다.

강태식
"그래서 사업할 사람을 찾고 있어. 내가 사업 아이디어가 있는 건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근데 좋은 놈이 있으면 같이 할 수 있거든. 내가 가진 건 사람이야. 30년 동안 쌓은 인맥."

진호는 소주잔을 돌렸다.

이 사람은 뭘 원하는 걸까. 15년 전이라면 이 자리에서 명함을 꺼내고 미팅 일정을 잡았을 거였다. 지금은 — 명함이 없었다.

강태식
"너는?"
박진호
"저요?"
강태식
"영수가 100억짜리 사업 했다고 하던데. 지금은 공사장이잖아. 그 사이에 뭔 일이 있었는지 안 물을게. 근데 하나만 물어보자."

태식이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진호를 똑바로 봤다.

강태식
"다시 할 생각 있어?"

식당이 조용해졌다. 감자탕 끓는 소리만 남았다.

다시 할 생각. 있었다. 매일 밤 고시원에서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12페이지까지 왔다. 단말기 안의 AI가 데이터를 뽑아주고, 진호가 읽고, 정리하고, 구조를 잡았다.

하지만 그 말을 이 사람에게 해도 되는 걸까.

최승재도 처음엔 이런 자리에서 시작했다. 소주 한 잔에 "같이 하자"고 했다. 그리고 5년 후에 회사를 가져갔다.

박진호
"...있습니다."

입에서 나왔다. 생각보다 먼저.

강태식
"뭔데?"

진호는 잠깐 멈췄다. AI 얘기는 하면 안 됐다. 아직.

박진호
"중소기업 대상으로 AI 도입 컨설팅. 비용 절감 시뮬레이션을 만들어서 보고서로 파는 겁니다. 지금 만들고 있습니다."
강태식
"보고서를?"
박진호
"네."
강태식
"혼자서?"
박진호
"...네."

태식이 소주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 AI TEAM LEADER — BACKGROUND MONITORING CEO 심박수 상승 감지. 긴장도: 높음 현재 대화 상대 분석: 불가 (데이터 없음) 주의: 과거 패턴상 동업 제안 시 리스크 상승

주머니 안에서 단말기가 한 번 진동했다. 진호는 무시했다.

강태식
"그 보고서. 나한테 보여줄 수 있어?"

진호가 태식을 봤다. 태식이 진호를 봤다.

감자탕 국물이 보글거렸다. 소주병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박진호
"...완성되면요."
강태식
"그래. 기다릴게."

태식이 웃었다. 처음이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정도. 크게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호는 소주를 마셨다. 목이 탔다.

돌아가면 13페이지를 써야 했다. 17페이지가 남았다.

처음으로 — 누군가에게 보여줄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제8화 끝

제9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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